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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전제- 참회
작성자 감로사 작성일 2006-01-24 조회수 481
懺悔 - 신앙의 전제


정 철 호/동아대학교 강사의 논문
(21세기 佛敎信行의 과제-在家佛敎의 입장-에서 발췌)


모든 불교도들은 그들이 선택한 法道가 어떤 것이던 간에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한 성실한 비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승불교에서는 자기 비판의 한 방법으로서 참회를 제시한다. 진실한 참회 없이 진실한 신앙이 생길 리가 만무하고, 혹시 그러한 신앙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기만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念佛道를 수행하는 자는 참회에 있어서 보다 투철해야 한다. 일본의 親鸞은 이러한 참회로서 "자기는 어떠한 중생들보다 惡人이며, 자기 스스로는 단 하나도 이룰 수 없는 무력자임"7)을 자각했다. 親鸞은 일본인들에게는 聖人으로 불려지는 사람으로 그가 유래 없는 惡人이었는지는 쉽게 수긍이 가지 않지만, 우리가 여기서 느낄 수 있는 것은 투철한 자기 반성을 통해 진실한 신앙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참회는 진실한 신앙을 가지기 위해서는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이다.

참회에 관해 원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본래 (죄가) 없는 것이 지금 (죄가) 있게 된 것은 까닭 없이 생긴 것이 아니다. (죄) 지음도 없고 (벌) 받음도 없으나, 시간과 공간이 화합하여 그 果報를 받게 되는 것이다. 수행자가 끊임없이 그 實相을 사유하여 참회할 것 같으면, 四重罪8)와 五逆罪9)가 소멸되고 말 것이니, 마치 불이 허공을 태우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게으름으로 뉘우침과 부끄러움이 없이 죄업의 실상을 사유하지 않는다면, 비록 죄업이 없다고 하나, 장차 지옥에 들어가게 될 것이니, 마치 환술로 만든 호랑이가 도리어 환술사를 삼키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깊이 부끄러운 마음을 내어 시방의 부처님께 참회를 해야 한다. 참회를 할 때는 (거짓으로) 지어 하지 말고, 바로 참회의 실상을 사유해야 한다. 참회해야 하는 것이나 참회되는 것이 있을 수가 없는데, 어느 곳에 참회의 법이란 것이 있겠는가. 모든 業障에 대해 이렇게 참회하고 나서 六情의 게으름에 대해서도 반드시 참회해야 한다."

원효는 먼저 우리 중생에게는 죄가 없다고 한다. 중생은 바다와 같아서 원래 깨끗함의 一心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죄가 생길 여지가 없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을 원효는 {大乘起信論疏}에서 이것을 眞如門이라고 하였다. 중생의 본성은 이미 진여의 바다에 있으며, 이 바다는 하나의 맛으로 이루어진 절대 청정의 세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죄와 벌이 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중생은 윤회의 시간과 三世의 공간에서 업을 받아 生滅의 세계에서 果報를 나타내게 된다. 이 果報는 生滅門이며, 生滅門은 마치 바다가 바람에 거칠어지듯이 순간적이다. 그렇다고 본래의 바다가 변한 것은 아니다. 거친 바람을 잠재우면 그 바다는 본래의 바다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生滅의 바다는 이미 眞如의 바다에 속해 있다. 중생도 이와 마찬가지로 이미 진여에 있으나, 시간과 공간의 바람에 출렁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래는 죄가 없으나, 이 업보의 죄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중생에게는 죄가 원래 없고, 죄가 없으니 벌도 있을 리 없으며, 죄와 벌이 없으니 참회라 할 것도 없다. 그러나, 출렁이는 바다가 바람에 의하듯이 중생도 생멸의 바람을 피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 바람을 잠재우지 못한 죄가 있는 것이다. 이 바람을 이겨내지 못한 중생의 게으름을 참회하자는 것이다. 죄는 없으나, 참회할 것은 있다는 원효의 생각은 중생은 이미 구제되어 있다는 그의 일관된 주장과 잘 연결되어 있는 名文이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으로 무엇을 참회하란 말인가. 원효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와 중생이 無始이래로 萬物이 無生임을 알지 못하고, 망령된 생각과 뒤바뀌어진 생각으로 나와 나의 것을 분별하고, 안으로는 六情11)의 몸을 내세워 거기에 의지하고 분별하는 識을 내며, 밖으로는 六塵12)을 지어내서 그것을 실제로 있다고 집착하니, 이것은 모두 나의 마음이 지어낸 것임을 알지 못한다. 허깨비와 꿈과 같아서 영원히 취할 것이 없는데도, (幻夢)속에서 남녀 등의 모습 등을 헤아려, 모든 번뇌를 일으켜 자기자신을 속박하고 묶어서 오랫동안 고통의 바다에 빠져 헤어날 길을 구하지 아니한다. 차분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잠을 자고 있을 때 잠에 깊이 취해 자기의 몸이 큰 물에 떠내려가는 것을 보고, 단지 그 꿈이 마음의 것인 줄 모르고, 실제로 물에 빠진 것이라 매우 두려워하다가, 아직 깨지 않은 채로 다시 다른 꿈을 꾸면서 "내가 본 것은 꿈이지, 사실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心性이 총명한 까닭으로 꿈속에서의 꿈인 줄 알고, 물에 빠졌던 꿈에 대해서 (꿈인 줄 깨달아) 겁을 내지 않으나, 그래도 아직은 자기 몸이 침상 위에 누워 있으나, (그것을) 알지 못하고 머리를 움직이고 손을 흔들어 힘써 온전히 깨어나고자 한다. 온전히 잠에서 깨어나서 앞의 꿈을 돌이켜 보면, 물과 떠내려간 자기자신이 모두 존재하는 바가 없으며, 오직 본래대로 잠자리에 고요히 누워 있음만을 볼뿐이다."

이 부분의 원효 참회사상에 대해서는 정순일 교수의 상세한 해설이 있다. 그러나 필자는 좀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고 싶다. 원효가 말한 죄 없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회해야 한다는 것을 종교의 근원적인 측면에서 이해하고 싶다. 인간은 지금 有限者로서 한정된 삶을 살고 있지만 영원한 無限者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공간적으로 이야기하면 지금 지구 그 중에서도 한국이라는 부분에 살고 있지만, 이 한국이라는 부분은 대우주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고, 시간적으로 말해도 현재의 시간 속에서 7∼8십년의 생으로서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無始의 과거와 無終의 미래에 현세적 삶의 시간이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에서 종교의 본질이 출발한다고 여겨진다. 지금 현재 자기자신은 여기에 있어서 이미 無限者 속에서 살려지고 있다는 감정 속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우주를 直觀하고자 하는 것이 종교의 본질이 아닐까 한다. 無限者 속에서 살려지고 있는 한 인간은 죄가 있을 여지가 없다.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의 諸佛의 의지 속에서 살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도덕, 예술, 학문, 정치, 경제 등이나 과학 기술을 발전시켜서 여러 가지를 만들며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일면 위대한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은 유한의 틀을 벗어날 수 없는 것들이다. 유한자들 간의 관계 속에서는 죄와 참회가 필요한 것이다. 원효는 무한의 관계 속에서의 죄 없음과 有限들간의 죄 있음을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현실적인 참회를 하면서도 항상 인간은 무한과의 관계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되고, 항상 자기가 무한 속에 있다는 근원적인 성찰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무한 속에서 빠져 나올 길이 없다. 그것을 인식하는 출발점이 참회이다. 인간이 아무리 自力의 業을 일구어 내도 돌아서 보면 모두 무한의 꿈속에 있는 것이요, 무한의 세계로 연결하여 보면 고요히 침상 위에 누워있는 유한자의 본 모습일 뿐이다.

이와 같이 참회는 무한한 것에 귀의하여, "절대 귀의의 감정"을 일으키게 하는 사고의 전환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귀의는 절대 의존의 뜻이며, 佛子들이 예불 때 合誦하는 至心歸命이기도 하다. 그리고 淨土門에서 말하는 자기의 힘, 인간의 자력이 아니라, 우리 중생은 절대적으로 阿彌陀佛의 願力이라는 무한자의 품안에 있다는 신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올바른 신심은 바로 내가 유한자라는 사실, 무한의 그늘 아래서 그 어떤 것도 이루어 낼 수 없다는 참회에서 생기는 것이다. 나의 힘과 능력을 믿고 내가 무한의 그것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마음으로 만 번의 아미타불의 명호를 칭명한다 한들 그것은 신심의 염불이 아니다. 참회는 무한의 원력이 우리의 마음속에 이미 들어와 있음을 깨닫게 하는 진실한 자기성찰이라고 생각한다. 석가의 깨달음도 우리의 마음속에 내적 우주가 존재하고 있음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이 무한의 우주 안에 작은 자기가 연결되어 있고, 작은 자기의 一切의 行은 무한의 우주에 따르고 있다는 자각이 있음으로 진실한 무한에 대한 귀의가 시작된다. 신앙이란 우주 안에 있는 자기의 자각 같은 것, 자기가 무한 안에 있다고 하는 것에서 오는 現存在의 空無性의 느낌 등에서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무한의 것이 작은 자기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에서 원효는 죄 없음을 말하고 있고, 現存在의 空無性에서 우리는 죄 있음을 자각하여 참회를 필요로 한다.

참회는 유한의 내가 무한의 절대에게 일체의 모든 것을 의지하고 맡기는 歸依의 마음 자세이다. 원효는 {大乘起信論疏}에서 특별히 歸命15)이란 말로 이것을 표현했는데, 이러한 마음 자세를 아주 잘 표현해주고 있다.
이와 같이 참회는 자기가 무한 절대에 의해 존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 존재하고 있다는 자만심으로 시작하여, 객관의 모든 세계가 나로 말미암아 존재할 수 있다는 헛된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 전환에서 진실한 신앙이 생기게 된다. 내가 무한의 절대에 의해 존재하고 있다는 자각은 자신을 下下品의 중생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하고, 이 下下品의 중생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무한의 절대자의 원력에 의존하는 길 뿐이라는 신앙을 가지게 한다. 이러한 믿음은 기계적이고 형식적인 외형의 신앙이 아니라, 투철한 자기자각을 통한 믿음을 가지게 된다. 원효는 이것을 특별히 信解라고 하였으며, 이 信解야 말로 무한의 절대에 나의 모든 것을 맡기는 仰信18)의 바탕이 된다. 그리고 이 仰信에 와서 중생은 죄 있음에서 죄 없음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미 죄 조차도 무한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참회는 헛된 꿈에서 벗어나 본래의 침상으로 돌아가는 기초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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