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납은 영축산 통도사에서 첫 사문의 길을 밟았습니다. 그러니까 꼭 46년 전 입니다. 지금도 통도사 산문을 들어서서 걸어가는 산책길은 노송이 퍽 아름답습니다. 어떤 노송은 하늘로 쭉 뻗은 것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축 늘어져 개울가에 몸을 눕힌 것도 있어 그대로 만물상입니다. 그렇게 보존된 소나무를 보면서 한편으로 그 소나무들이 고맙기도 하고 또 천년 세월을 버텨온 힘이 거룩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스님들께서는 가끔 후학들을 가르칠 때 산 지키는 나무 이야기를 합니다. 곧게 잘 자란 나무는 쓸만한 재목이 되어 사람들에게 발견돼 잘려나가기 십상이지만, 꾸불꾸불 못생긴 나무는 그나마 오랜 세월 그대로 남아서 산을 지킨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에는 잘생긴 나무나 못생긴 나무나 모두 다 쓸모가 있게 마련입니다. 못생겼다고 구박할 일도, 잘생겼다고 자랑할 일도 못된다는 말입니다. 좀 못났더라도 잘난 사람 뒤에서 묵묵히 산을 지키면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잘 나면 또 얼마나 잘 났겠습니까? 잘려 나가기 밖에 더 하겠습니까? 잘난 사람 때문에 속상해 하지 말고 가는 길이나 묵묵히 걸어가는 편이 더 현명할 터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세상은 항상함이 없이 변한다고 하셨습니다. 오늘의 불행이 내일도 또, 그 다음 날도 계속 불행하도록 되어 있다면 무슨 살 맛이 나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명쾌하게 밝히셨듯이 제행무상하기에 불행도 잠깐 스쳐지나고 나면 또 더러는 행복도 오는 것입니다. 나는 왜 이리도 못났을까? 내 부모는 남의 부모보다 왜 잘 나지 못했을까? 자식들은 또 왜 이 모양이냐고 탓할 것도 없습니다. 설령 그렇게 못났다고 하더라도 산 지키는 나무 정도는 될 것이니 비관만 할 일은 못됩니다. 못난 나무들이 모여서 편안한 오솔길을 만든 통도사 입구 소나무 숲길을 생각해 보십시오. 못난 소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