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bSTT


해당 게시물을 인쇄, 메일발송하는 부분 입니다.
의 게시물 상세내용 입니다.
"성불하세요"와 "아라한이 되세요"의 차이점
작성자 혜수 작성일 2004-07-29 조회수 1535
부처님 성지를 순례한 뒤, 나는 어떻게 변화되었던 것일까? 마음이 맑아짐을 느꼈다. 부처님 성지를 순례하면서 특별히 기도를 많이 하거나 참선을 한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참으로 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부처님의 가피력? 아니면, 부처님 성지가 주는 묘한 힘? 그러리라 생각된다. 그 같은 타력(他力)이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그와 함께 생각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내가 갖게 된 "감사하는 마음" 때문이 아닐까 한다. "우리가 근원적으로 감사해야 할 것은 우리 나라에 태어난 것, 부처님 법을 만난 일이다." 첫번째 여행을 할 때만 하더라도 우리 나라에 대한 염오(厭惡)의 감정이 적지 않았는데, 두 번째 성지 순례를 통해서 방하착하게 되었다. 또 하나는, 그 전에는 남들이 나를 비방하거나 욕한다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불편하였다. 그러나, 성지 순례를 마친 뒤에는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쎄, 이 마음이 계속될 수 있을까? 계속되지 않는다면? 부처님 성지로 다시 떠나야겠지.

불교에서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의 이념을 구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위로는 열심히 수행 정진하여 스스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성취하신 바와 같은 깨달음을 얻는 것이고, 아래로는 중생들을 교화하여 참된 지혜와 자비의 삶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을 본받아 스스로의 완성된 삶을 추구해 나감과 아울러 이웃에도 일깨워 도덕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각성된 사회, 다시 말해 정의롭고 자유로우며 평등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이루어 가는 것 그것이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절은 곧 하심(下心)이다.
또한 자신의 마음을 비우는 작업입니다.
물건이 기울어져야 속에 찬 것이 기울어지는 것처럼 몸을 낮추어 겸손한 자세를 갖추면 야만심,자존심,이기심,선입 관념,고정 관념을 쏟아낼 수 있다.
소승은 열소(劣小)한 수레라는 뜻으로 많은 사람들이 함께 타고 피안에 이를 수 있는 큰 수레가 아니라고 한다.
연꽃은 불교를 상징하는 꽃입니다.
부처님은 설법을 하실 때에도 연꽃의 비유를 많이 들었다. 또한 선가(禪家)에서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요, 이심전심의 묘법(妙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어느 날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부처님이 설법은 하시지 않고 곁의 연꽃 한 송이를 들어 대중에게 보였는데 제자 중에 가섭 존자가 홀로 미소를 지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마음으로 마음을 속속들이 전하는 도리로서 선종(禪宗)에서는 세곳에서 마음 전한 이치(三處傳心)라 하여 중히 여기고 있다.
연꽃이 불교의 상징적인 꽃이 된 것은 다음 몇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첫째, 처렴 상정이라 하여 더럽고 추하게 보이는 물에 살지만, 그 더러움을 조금도 자신의 꽃이나 잎에는 묻히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불자(佛子)가 세속에 처해 있어도 세상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아름다운 신행(信行)의 꽃을 피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또한 보살(菩薩)은 홀로 자신의 안락을 위하여 열반의 경지에 머물러 있지 않고 중생의 구제를 위해 온갖 죄업과 더러움이 있는 생사의 세계로 뛰어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 화과동시(花果同時)이기 때문입니다. 연꽃은 핌과 동시에 열매가 그 속에 자리를 잡습니다. 이것을 연밥(연실.蓮實)이라 하는데, 즉 꽃은 열매를 맺기 위한 수단이며 열매의 원인인 것입니다. 이 꽃과 열매의 관계를 인과(因果) 관계라 할 수 있으며 인과(因果)의 도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중생들은 이 인과의 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기에 온갖 죄악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연꽃의 봉오리는 마치 불교 신도가 합장하고 서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에 태국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풍습은 동네의 스님들이 시주 단지를 들고서 동네를 쭉 돌면 미리 나와 있는 동네 주민들이 그날의 일용 할 양식과 절에서 필요한 소모품들을 시주 합니다. 스님들은 어떤 음식이던지 가리지 않고 받아야 하고, 또 불평하지 않고 음식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주민들이 준 음식에 고기가 섞여 있어도 그냥 먹습니다.
이렇게 시주를 받으러 다니는 탁발이라는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두타행 중의 하나로 승려들이 걸식으로 의식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불가에서 출가 수행자들이 지켜야 할 규율인 12두타행 중 걸식과 같은 뜻으로 쓰입니다. 발이란 음식을 담는 그릇인 발우를 일컫는 말이고, 탁발이란 걸식하여 얻은 음식을 담은 발우에 목숨을 기탁한다는 의미이다.
수행자에게 탁발을 생활 수단으로 한 것은 그들이 상업 활동은 물론 어떤 생산 활동도 할 수 없다는 현실적 필요에서입니다. 그리고 수행자는 탁발을 통해서 수행의 가장 큰 적인 아만과 고집을 없애고, 보시하는 쪽으로 보면 선업을 쌓는 공덕이 되기 때문입니다.
<<유마경>> <제자품>에는 탁발의 방법과 그 공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걸식은 평등한 법에 머물러 차례대로 해야 됩니다. 걸식은 식용을 위한 것이 아니며 음식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마을에 들어 갈 때는 사람이 살지 않는 빈 마을이라 생각하며 들어가고, 보고 듣고 느끼고 하는 온갖 분별은 깨달음의 경지에서 하여 모든 것이 꼭두각시 같은 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걸식한 밥은 모든 중생에게 베풀고 부처와 성현에게 공양한 다음 먹어야 남의 보시를 헛되이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먹을 수 있는 사람은 번뇌를 버리지 않고서도 해탈에 들고, 집착을 끊지 않고서도 깨달음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이에 따라 12두타행은
"상행걸식" "차제걸식" "수일식법" 등의 조항을 두고 있습니다. 즉, 항상 걸식하여 먹을 것을 해결할 것과 걸식할 때는 가난한 집과 부잣집을 가리지 않고 차례로 할 것, 그리고 하루에 한 끼만 먹을 것 등을 규정한 것입니다.
"티베트 불교의 수행자들은 다섯가지의 방위와 우주의 다섯 요소(목, 화, 토, 금, 수)를 나타내는 오색으로 물들인 모래로 맨땅에 그림을 그립니다. 바로 "만다라"입니다. 둥근 원안에 정사각형, 정사각형 안에 또다시 둥근 원을 반복적으로 그리는 이 작업은 종교적 의례입니다. (그림을 그리기 전에 수행자들은 명상이나 절을 통해서 마음을 가다듬고 땅을 고르고 깨끗이 합니다.) 몇 날 몇 일이 걸려 정성껏 그림 만다라 앞에 꽃과 향을 공양하고 그 앞에 서서 신의 에너지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신성한 소리인 만트라(mantra)를 암송합니다. 만다라 의례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불성을 깨우칩니다. 의례가 끝난 후 모래로 그려진 만다라는 "후" 하는 숨결과 함께 공기 속으로 날아가 버립니다.
사찰은 불자들만의 신앙 공간이 아니라 대중의 정신적인 귀의처요 시민들의 휴식 공간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사찰을 찾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대다수 겉치레 구경만 하고 돌아올 뿐 사찰이란 공간 속에 자리한 숱한 조형물들이 왜 거기에 있는지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일주문은 왜 서 있고 천왕문은 무엇이며 불이문은 또 무엇인가.
사찰의 요소 요소를 지키고 선 모든 건축물들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해탈과 교화의 의미, 그리고 불국토를 향한 수행 과정의 상징물입니다.
불교는 세계의 중앙에 가상의 산인 수미산(須彌山)을 설정하는 독특한 우주관을 정립하고 있습니다.
절 입구의 일주문(一柱門)과
가운데의 천왕문(天王門) 그리고
마지막 불이문(不二門.또는 解脫門)을 차례로 통과하는 것은 사바 세계를 떠나 수미산을 오르며 불국 정토로 향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수미산의 기슭과 중턱 그리고 마루에 있는 것으로 가상할 수 있는 3개의 문을 삼문(三門)이라 하고 이를 통틀어 산문(山門)이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산문은 곧 '수미산문'인 것입니다.
절 입구에서 첫번째 만나는 관문인 일주문은 이름 그대로 일직선 기둥 위에 지붕을 얹은 건물로 일심(一心)을 의미합니다.
일주문은 대체로 다포계의 맞배 지붕 양식을 취하고 있으며 일주삼칸(一柱三間)을 원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일주문을 통과해 만나는 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外護神)인 사천왕(四天王)을 모신 전각입니다. 험상궂은 얼굴에다 울긋불긋한 갑옷을 걸치고 큰 칼을 든 사천왕이 수미산 중턱의 동서남북 외곽을 지키는 곳이 천왕문인 것입니다.
금강 역사와 천왕문이 일주문과 불이문 사이에 위치하는 까닭은 우선 악귀를 내쫓아 사찰을 지키며 청정 도량을 찾은 중생들의 흐트러진 마음을 바로잡는데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천왕이 수미산 중턱을 지키는 더 큰 의미는 수행자가 마음 속에 깃든 번뇌와 좌절을 이겨내고 끝까지 구도의 길로 오를 것을 격려하는데 있습니다.
해탈을 추구하는 구도자가 수미산 정상에 오르면 제석천왕(帝釋天王)이 다스리는 도리천 위에 불이문(不二門)이 있습니다.
그것은 생사와 열반, 번뇌와 보리, 세간과 출세간, 색(色)과 공(空)이 둘이 아닌 경지로 들어서는 해탈문(解脫門)입니다.


진리의 성전
높이 105미터, 넓이 사방 100미터, 건물을 떠 받들고 있는 기둥만 170개 이상, 건물의 총 무게는 1만톤, 오직 나무로만 만들어진 건물.
진리의 성전은 모두 4개의 출입문을 통해 성전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네개의 문은 모두 각기 태국, 중국, 힌두, 크메르 양식으로 지어진 것입니다. 위리야판씨 한 개인에 의해 지어진 이 건물이 지어지게 된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철학이 담겨져 있습니다.
[일찌기, 세계의 냉전 시대부터 현재까지, 세상은 물질과 신기술에 모든 가치를 두는 서양 문명의 영향을 받아왔다. 이로 인해, 많은 자연 환경이 파괴되어 왔으며, 사람들은 점점 도덕과 정신을 배제하고 물질 만능의 사회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이들은 쉴새없는 전쟁과 경제적인 약탈로 다른 사람들을 파괴해 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직 현생의 행복만이 있으며 사후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이 성전은 종교와 철학이 성취되어 온 과정과 종교와 철학의 진실, 그리고 인간 사회가 종교와 철학에 의해 성취되고 교육되어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성전은 한 개인의 오만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며 종교와 철학과 예술의 장점을 바탕으로 지어진 것이다. 인간은 다음의 7가지 창조물이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다. 이는 하늘, 땅, 아버지, 어머니, 달, 해 그리고 별이다. 성전의 지붕의 각 네개의 첨탑은 서양의 철학에서 보여주는 인간의 기본적인 4가지 원소(물,바람,불,흙)를바탕으로 하고 있다.]
각 출입구 부근에 있는 아름다운 나무 조각 상들 중 연꽃을 들고 있는 나무 조각상은 디바-Deva-인도의 신화에 나오는 선한 악마-를 표현한 것으로 종교의 확립과 세상의 기둥을 의미합니다. 어린아이를 안고 노인들을 인도하는 조각상은 인간의 삶의 영속성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책을 들고 있는 조각상은 철학의 불멸과 지속을 의미하며,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비둘기를 들고 있는 조각상은 평화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가장 높고 정중앙에 위치한 말을 타고 있는 칼라키(힌두교의 열하나의 화신 중 한명, 모든 약한 것을 파괴하고 인간들에게 새로운 생을 준다고 함)는 프라 스리 아리야매트랄(Phra Sri Ariyametral-마지막으로 열반에 든 부처)을 형상화 한 것입니다. 이 성전은 사람들에게 인간의 구성요소인 7가지의 창조물과 4가지 원소에 대한 설명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각 개개인의 성찰의 중요성을 알려주기 위한 표현인 것입니다. 이 성전을 설계한 사람은 마하랏타와 라마야나(힌두교의 2대 서사시, 산스크리트어로 쓰여졌음)의 대 서사시를 인용하여 선과 악마의 전쟁을 표현하여 인간들 개개인을 깨우치려 하고 있으며, 각 인간들의 개인적 욕망과 욕심 또는 쾌락을 어떻게 다스리는가를 보여주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각 출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모두 일곱개의 테마로 나뉘어진 조각상들을 통해 동양의 철학을 볼 수 있게 디자인 되어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세상은, 그리고 인간은 일곱가지의 창조물이 갖추어 져야만 이 지구상에 존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우선 이 성전의 주요 출입문이라고 할 수 있는 태국관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한 가족을 표현한 조각상부터 보도록 하지요. 이 조각상은 부모의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순수하고 깨끗합니다. 대가를 바라고 주는 사랑이 아닌 아무런 대가없이 내려지는 사랑이지요. 이는 마치 아무런 장애없이 흐르는 깨끗한 물처럼 마음과 정신을 새롭게 해주는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어버이날에 부르는 노래처럼 부모님의 사랑은 하늘과 바다보다 크고 높다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조각상입니다. 이곳을 지나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그곳에는 인도의 신앙 철학을 바탕으로한 조각상들이 나옵니다. 제일 처음 보이는 것이 크리슈나바타(Krishnabatar-힌두교에서 숭배하는 크리슈나신)의 조각상입니다. 크리슈나바타는 비슈누(Vishnu-브라마, 쉬바와 함께 인도 힌두교의 3대 신중의 하나)의 8번째 환생의 모습입니다. 성전의 네개의 출입구를 네가지로 분류했을 때 인도 성전 부분인 이곳의 전체적인 모습은 크리슈나와 바라나(Vardhana-힌두교의 성도)가 악마와 싸우는 전쟁을 묘사한 것입니다. 크리슈나가 나가의 머리에 서있는 모습 등 여러가지의 조각상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인도의 2대 서사시중 하나인 마하랏타(산스크리트어(범어)로 쓰여진 고대 인도의 2대 서사시 중의 하나, 다른 하나는 라마야나가 있음)의 내용 중에 등장하는 이 전쟁은 선과 악의 전쟁이었습니다. 크리슈나는 선의 편에 서서 판다바왕을 도와 악마의 왕 쿠라바와 맞서 싸우게 됩니다. 판다바왕이 전쟁터에 나서기 전 크리슈나는 그에게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정의를 내려주게 됩니다. 이는 나중에 비슈누의 가르침이 되어 힌두교의 가장 유명한 성전의 바탕이 됩니다.
그 다음에 보게 되는 나무조각상은 바로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9개의 행성에 대한 표현입니다. 오래 전 인간들이 별을 관측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지구 근처의 아홉개의 행성은 인간의 삶을 조정하는 행성들이라고 믿어왔습니다. 태양은 인간의 사회성과 명예를 상징합니다. 달은 발현을 의미하고, 화성은 용기와 근면을 상징하고, 수성은 친절함을 목성은 현명함, 금성은 재물 그리고 토성은 불행과 고난을 각기 상징합니다.
다음으로 둘러볼 곳은 중국관입니다. 중국관에는 초자연적인 형상이나 동물들과 함께 보디사타바를 포함한 마하얀 불교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마하얀 불교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구분하고 있는 불교의 두가지 뿌리 중 하나입니다. 불교는 크게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로 나뉘어 지는데, 중국관의 그것은 대승불교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보여지는 커다란 수레는 바로 인간들의 삶과 죽음의 순환에 이용되어지는 수레를 의미합니다. 이곳에서 보여지는 보디사타바는 바로 열반에 들어갈 수 있는 해탈의 상태에서 열반에 들기를 거부하고 고통받는 중생을 위해 세상에 남기를 원했던 부처입니다. 이곳에서 궁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은 이승에서 좋은 삶을 살고 공적을 쌓으면 보통의 사람이라도 이승에서의 업보의 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다음은 브라만교의 가르침을 표현한 곳입니다. 이곳에서는 세상의 모든 구성물 즉 네가지 원소-흙, 물, 바람 그리고 불의 생성과 마하부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네 원소들의 신이 바로 브라마, 쉬바 그리고 비슈누입니다. 그 중에서 쉬바신은 흙 또는 대지의 신입니다. 크렐리아스산에 살고 있는 그는 앞 이마에 세번째의 눈이 있다고합니다. 그가 그의 세번째 눈을 뜨면 그가 바라보는 모든 것은 불에 타버린다고 합니다. 즉 그는 불의 신이지요. 비슈누는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아난타 나가랏이라는 곳, 또는 바다의 젖줄에서 잠을 잔다고 합니다. 물의 신입니다. 브라마는 백조를 타고 다니는 신입니다. 하늘과 바람을 관장하는 신이지요. 이 곳의 바깥쪽으로 나가면 네개의 얼굴을 가진 브라마를 볼 수가 있습니다. 힌두교에 나오는 세명의 신 중 한명입니다. 브라마는 세상의 모든 시초를 만든 신이라고 믿어지고 있습니다. 이 네개의 얼굴을 가진 조각물을 트리무아라티라고 부릅니다. 각 네개의 얼굴은 나타내는 뜻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온화, 자비, 환희 그리고 행운을 뜻한다고 합니다.다음 마지막 일곱번째는 명상관입니다. 사람은 그리고 사람의 모든 희노애락은 우주와 비교할 때 한갖 먼지 알갱이보다도 작습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인간의 삶을 보다 의미있게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모든 믿음과 종교는 모든 철학에서 비롯되고 그 방법과 나아갈 길은 제각각 다르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과거의 지식으로 어떻게 모든 인간들의 마음속의 평화와 본심 속에 평정심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해석을 내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진리의 성전이 뜻하고 바라는, 이곳을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가르쳐 주고 싶은 궁극의 목적인 것입니다.
진리의 성전을 건축한-물론 아직도 완공은 되지 않았지만- 장본인 쿤 렉 위리야판씨는 사업가 가족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숨 팽에 있는 한 약국을 운영하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위리야판씨의 아버지는 상당한 바람둥이였다고 합니다. 그로 인해 여러명의 어머니들과 7명의 형수를 두었었다고 합니다. 그의 가족들은 아마도 위리야판씨는 이러한 이유로 인해 태국을 떠나 중국에 있는 그의 친척들을 찾아가 그곳에서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을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에서 공부를 하던 위리야판씨는 중국 정부에 대항하여 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체포되었다고 합니다. 중국 정부는 그를 다시 태국으로 보내버렸습니다. 평소 아버지의 바람끼 때문에 항상 원망만 하던 아버지였으나 위리야판씨는 그의 아버지가 아플 때에는 항상 자청하여 간호를 해주던 자상한 아들이었기도 하다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50세에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죽자 위리야판씨는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아 약국을 운영하였고 약국을 바탕으로 큰 돈을 벌기 시작했습니다. 항상 정직과 신용을 바탕으로 여러가지 사업을 하였던 위리야판씨는 그의 정직성 때문에 지금의 자신이 있는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자신의 자녀들에게 가르쳐 왔다고 합니다. 그는 방푸에 있는 무앙보란(Ancient City)과 에라완 코끼리 박물관을 지었고 진리의 성전을 직접 디자인 하였다고 합니다. 지난 2000년 11월 17일 위리야판씨는 진리의 성전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2001년 9월 4일 그의 화장식에는 이례적으로 태국의 푸미폰 국왕과 시리킷 여왕이 참석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그만큼 태국에서도 그의 열정과 업적을 인정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싱가폴에서의 그 명성 그대로 태국에서의 여행을 책임집니다.
동양 철학 강의와 대한민국 고유의 침술인 수족 육기침과 함께 태국 불교 성지 순례를 웬디타이가 함께 합니다.
WENDY TOUR (웬디투어) ☎ 02-738-1661
서울 서초구 서초동 1535-13 선산B/D 1F FAX : 02-737-6232
과장 박 소영
WENDY THAI TOUR ☎ 001- 662-665-7054-5 FAX : 001-662-665-7052
wendythai@hotmail.com 혜수 김학준
성불하십시요.
download : 첨부파일다운불교 성지 순례.doc
작성자 비밀번호
※ 게시판 성격에 맞지 않는 댓글은 관리자에 의해 삭제될 수 있습니다.
이전글 :   아름다운 인연
다음글 :   기도접수 문의에 대한 종무실의 불친절과 짜증
글쓰기 답글작성 삭제 수정 리스트
게시물 수 : 501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수
41      답글 Re : 주지스님께   혜총스님 04.08.16 1,555
40 불자들을 위한 불교전문포탈   사자후 04.07.30 1,805
39 "성불하세요"와 "아라한이 되세요"의 차이점   혜수 04.07.29 1,535
38 아름다운 인연   룸비니 04.07.04 1,668
37 대만 불광사를 다녀와서..   일품행 04.06.29 1,612
36 대만 불광사를 다녀와서..   일품행 04.06.29 1,812
35 대만 불광사를 다녀와서..   일품행 04.06.29 1,627
34 해남 대흥사 여름수련회 안내   대흥사 04.06.28 1,598
33 - 범어사 법통수호승가모임 발족에 즈음하여 -   승가모임 04.06.11 1,579
32 세계적인 사원 앙코르 와트 전시회합니다.   김지은 04.05.27 1,589
<<    <   [41] [42] [43] [44] [45] [46] 47 [48] [49] [50]    >    >>